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헬무트 폰 몰트케 (문단 편집)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 이후 보오전쟁이 발발했을때, 몰트케가 세운 철도와 통신망을 활용한 전술이 위력을 발휘했다. 프로이센군의 숫자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오스트리아 제국군]]보다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몰트케는 산업혁명이 낳은 기술들을 활용한 자신들의 군대가 더 강하다고 판단하였으며, [[에두아르트 보겔 폰 팔켄슈타인]]의 군대는 병력과 탄환이 떨어진 [[하노버 왕국]]을 금방 점령하였다. 남독일군을 몰아낸 이후, 팔켄슈타인은 보급의 문제로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몰트케와 빌헬름 1세는 진격명령을 내렸지만, 상대방의 항복만 기다리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몇몇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노버 왕국의 항복을 받아내기는 했다. 독일 지역에서 오스트리아의 연합 세력을 정리한 몰트케는 이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에 160km떨어진 채로 주둔해있던 두 개의 군을 이용해 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오스트리아의 [[루트비히 폰 베네덱]]의 군대는 몰트케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격하였지만, 정작 베네덱의 목표는 멀리있던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왕세자]]의 제 2군이었다. 그렇게 몰트케는 [[쾨니히그레츠 전투]]를 이끌었지만, 정작 본인은 오스트리아군의 퇴각을 막지 못해 더 큰 성과를 얻지 못해서인지 그 전투에 실망했다. 어찌 됐든 몰트케는 보오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평화조약에서 [[빌헬름 1세]]는 빼앗은 [[작센 왕국]]의 영토와 더 많은 땅을 원하였지만,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개입이 두려워 반대하였다. 몰트케는 빌헬름 1세에게 프랑스도 점령할 수 있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당장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실현되지 않았다. 이후 몰트케는 30,000 마르크를 하사받았다. 이 전쟁은 몰트케의 전술이 잘 드러난 전쟁이다. 몰트케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영감을 받은 사람이고, 전략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로 생각하였다.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지속적인 공격 개념을 개량했는데[*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가 사용하였던 방법이다.], 특히 정면공격보다는 적군을 포위한 후 궁지에 몰린 적군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정면 공격을 하게 만든 후 적군을 무력화시켜 신속히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적보다 많은 아군을 신속히 동원해 전역에 투입하고 각 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일찍이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이해한 그는 철도와 전신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철도와 전신의 군사적 효과는 앞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입증된 바 있었다.] 그가 애용했던 전략 중 하나는, 우선 적의 병참선을 끊은 후 적이 병참선을 다시 연결하러 왔을 때, 적을 무찌르는 것이었다. 그의 미래를 내다본 이러한 통찰력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